사나에노믹스 (인플레이션, 엔저, 재정적자)
최근 뉴스에서 일본 경제 얘기가 자꾸 나오는데, 솔직히 처음엔 '또 엔저 얘기겠지'하고 흘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카이치 총리의 사나에노믹스가 총선 압승으로 힘을 받으면서 상황이 좀 달라졌습니다. 아베노믹스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지금 일본 경제 어디쯤 와 있는지 제가 이해한 대로 풀어보겠습니다.
아베노믹스와 지금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사나에노믹스라니까 결국 또 돈 푸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셨다면, 저도 처음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니 상황이 꽤 다릅니다.
아베노믹스가 시작된 2012년 무렵,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디플레이션이었습니다. 디플레이션이란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으로, 소비자는 "더 기다리면 더 싸질 거야"라며 지갑을 닫고, 기업은 투자를 미루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당시 닛케이 지수는 7,000포인트대였고 엔 달러 환율은 1달러에 75엔 수준이었습니다. 엔화가 극도로 강했고, 물가는 내려가는 상황이었죠.
지금은 정반대입니다. 물가는 이미 2%를 상회하는 인플레이션 상태고, 엔 달러 환율은 155엔대까지 올라왔습니다. 1달러를 사려면 10년 전보다 두 배나 많은 엔화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닛케이 지수는 한때 59,000포인트를 넘었습니다. 출발점이 완전히 다른데 같은 처방을 쓸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엔 쉽지 않습니다.
아베 당시 미국이 레이트 체크(Rate Check)를 요구한 적이 있었냐고 생각해 보면, 없었습니다. 레이트 체크란 중앙은행이나 재무부가 특정 통화 환율의 현재 시세를 금융기관에 직접 물어보는 행위로, 시장 개입을 준비하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로 받아들여집니다. 실제로 미국 재무장관이 엔 달러 환율에 레이트 체크를 주도했다는 소식이 나오자 엔화가 즉각 강세로 전환됐습니다. 그만큼 지금의 엔저는 단순히 일본 내부 문제를 넘어섰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아베노믹스와 사나에노믹스의 출발 조건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물가: 아베노믹스 당시 마이너스(디플레이션) → 현재 2% 초과(인플레이션)
- 엔 달러 환율: 2012년 75엔 → 현재 155엔대
- 닛케이 지수: 약 7,000포인트 → 한때 59,000포인트 돌파
- 재정 상태: 부채 심각 → 현재도 GDP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 부채 유지
엔저가 부메랑이 되는 이유
엔화가 약해지면 수출 기업에 유리하다는 건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 서민들은 그 혜택을 실감하고 있을까요? 저는 아닐 거라고 봅니다.
엔저가 이어지면 수입 물가가 오릅니다. 일본은 에너지와 식료품의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데,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그만큼 더 많은 엔화를 써야 같은 양을 살 수 있습니다. 결국 마트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 전기요금을 내는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겁니다.
자산이 있는 사람들은 상황이 다릅니다. 부동산과 주식이 크게 뛰었으니 물가 상승을 어느 정도 헷지(Hedge)할 수 있습니다. 헷지란 한 자산의 손실을 다른 자산의 이익으로 상쇄하는 전략을 뜻합니다. 반면 자산이 없는 청년층은 치솟은 집값에 진입 장벽이 높아진 데다 물가 상승까지 겹쳐 이중으로 부담을 받습니다. 이건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사회 양극화 문제입니다.
미국 측의 시각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 재무부 고위 당국자가 "일본은행이 인플레이션 대응에 뒤처져 있어 기준금리를 인상해야 한다"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했습니다(출처: 미국 재무부). 외국 당국자가 타국의 통화 정책을 직접 비판하는 건 드문 일입니다. 그 배경에는 일본 장기 국채 금리의 상승이 미국채 수익률까지 끌어올리는 파급 효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엔저 → 일본 물가 상승 → 일본 장기금리 상승 → 미국 금리 상방 압력이라는 연결 고리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아베노믹스처럼 무제한 엔화를 찍어내는 정책이 가능할지, 저는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책임 있는 적극 재정'이 성공할 수 있을까
다카이치 총리는 총선 압승 이후 시장을 달래듯 "재정을 함부로 쓰지 않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세운 개념이 '책임 있는 적극 재정'입니다. 단순히 돈을 뿌리는 게 아니라 AI, 반도체, 양자 기술 등 미래 성장 산업에 약 21조 엔을 집중 투자해 새로운 세수(稅收)를 만들겠다는 구상입니다.
논리 자체는 이해가 됩니다. 정부가 생산적인 곳에 투자하면 기업 이익이 늘고, 고용이 창출되고, 소비가 이어지면서 법인세·소득세·소비세가 자연스럽게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증세 없이 세수를 늘리는 선순환이죠.
그런데 제 경험상 이런 그림은 계획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드뭅니다. 정부가 '유망하다'라고 찍어주는 산업이 꼭 시장에서도 통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자칫 산업 정책이 좀비 기업(Zombie Firm)을 양산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도 있습니다. 좀비 기업이란 정부 지원이나 저금리 덕분에 겨우 연명하지만 자생력이 없는 기업을 뜻합니다. 일본은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이 문제를 오랫동안 겪었습니다.
일본의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200%를 훌쩍 넘는 수준으로 선진국 중 최고입니다(출처: IMF). 이 상태에서 투자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면 재정 건전성에 대한 시장 신뢰가 흔들리고, 국채 금리가 급등하는 '부메랑'을 맞을 수 있습니다. 국채 금리가 오르면 정부의 이자 부담이 커져 정작 써야 할 곳에 돈을 쓰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저는 '책임 있는 적극 재정'이라는 말 자체보다 실제 집행 방식과 결과를 더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나에노믹스가 단순한 레토릭에 그치지 않으려면 민간 기업이 진짜로 지갑을 열어야 합니다. 정부의 21조 엔은 어디까지나 마중물입니다. 기업들이 일본 국내에 공장을 짓고 임금을 올릴 만큼 정책에 확신을 갖느냐가 결국 핵심 변수입니다.
결국 다카이치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긴장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성장을 위해 쓰되, 신뢰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이게 가능한지는 솔직히 지금 당장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아베노믹스 때와 경제 환경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외부의 시선이 훨씬 예민해졌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 변수가 사나에노믹스의 실질적인 한계선이 될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일본은행의 기준금리 결정과 엔 달러 환율 흐름을 함께 체크해 보시길 권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투자·금융 조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