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시대 국제정세 (해상 초크포인트, 황금 함대, 미중 패권)
솔직히 저는 해상 물류가 이렇게 직접적인 안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냥 배가 다니는 길 정도로만 생각했죠. 그런데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틀어막고 인도네시아 재무장관이 말라카 해협 통행세를 입에 올리는 장면들을 연달아 접하면서, 제가 얼마나 안일하게 세계를 보고 있었는지 깨달았습니다.
해상 초크포인트, 이제는 협상 카드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되면서 전 세계 물류 지도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초크포인트(Chokepoint)란 해상 운송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병목 구간을 뜻합니다. 군사적으로는 '전략적 요충지', 경제적으로는 '공급망의 숨통'에 해당하는 개념입니다. 이 좁은 구간 하나가 막히면 우회로를 찾는 데만 수십억 달러의 추가 비용이 발생합니다.
제가 직접 관련 업계 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번 사태를 단순한 중동 분쟁으로만 보는 시각이 아직도 많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현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이란은 지금 호르무즈라는 마지막 카드 하나를 쥐고 버티고 있고, 이 카드를 내려놓는 대가로 경제 제재 전면 해제와 해외 동결 자산 환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동결 자산 규모만 약 270억 달러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란의 전술이 다른 나라들에게 일종의 청사진을 제공했다는 점입니다. 인도네시아 재무장관이 말라카 해협 통행세를 언급했다가 즉각 철회한 사건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일반적으로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는 국제법상 당연한 권리로 여겨져 왔습니다. 항행의 자유란 어느 국가의 선박이든 공해와 국제 해협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다는 원칙으로, 유엔해양법협약(UNCLOS)이 그 법적 근거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 원칙을 적극적으로 수호하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신호를 각국이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경제에서 해상 물류 의존도가 얼마나 높은 지를 보면 이 문제가 더욱 실감 납니다. 중동산 원유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말라카 해협을 지나 남중국해를 거쳐 한국에 도달하는 경로는 대체 불가에 가깝습니다. 이 경로를 통과하는 교역량이 전 세계 해상 교역량의 약 3분의 1에 달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단순한 우려가 아니라 실질적인 경제 리스크입니다(출처: 국제해사기구 IMO).
황금 함대의 잔혹사, 트럼프는 '안 된다'를 모른다
트럼프 행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했던 골든 플리트(Golden Fleet), 즉 황금 함대 계획과 최근 펠런 해군 장관 경질 사건은 제가 가장 집중해서 지켜본 부분입니다. 일반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의 달인이며 현실적인 타협점을 잘 찾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보면서 저는 그 믿음에 상당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펠런 장관이 경질된 배경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2028년까지 미국산 구축함 생산이라는 목표를 직접 트럼프 대통령에게 약속
- 미국 내 조선업 생태계가 사실상 붕괴된 상태에서 이 목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
- 대안으로 이탈리아 핀칸티에리(Fincantieri)와의 협업을 제안했으나 트럼프 대통령 거부
- 해 그 세스 국방 장관과의 갈등이 누적되어 경질
여기서 MRO(Maintenance, Repair and Overhaul)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MRO란 함정이나 항공기 등 군사 장비의 유지·보수·정비를 담당하는 분야로, 신규 제조보다 진입 장벽이 낮아 외국 기업에 기회가 열려 있는 영역입니다. 한국 조선 기업들이 미국 시장에서 현실적으로 접근 가능한 것도 바로 이 MRO 분야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파트너로 들어갔다가 결과가 안 좋을 때 책임을 떠안는 상황입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목표가 달성되지 않았을 때 내부 담당자를 교체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는 것을 이번 사건이 분명히 보여줍니다. 같은 논리가 외부 파트너 기업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 해군 함정 건조 능력이 얼마나 약화되었는지는 미 의회조사국(CRS) 보고서에서도 반복적으로 지적되어 온 사안입니다(출처: 미 의회조사국 CRS).
미중 AI 패권 경쟁, 한국 기업이 놓치면 안 되는 신호
베선트 재무장관이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꺼낸 발언들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닙니다. "AI 경쟁에서 중국에 지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표현은 저도 처음 읽었을 때 과장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발언의 맥락을 따라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디리스킹(De-risking)이라는 개념이 핵심입니다. 디리스킹이란 디커플링(Decoupling), 즉 중국과의 완전한 경제 단절과 달리, 특정 전략 분야에서만 중국 의존도를 선택적으로 줄이는 전략을 의미합니다. 반도체, AI, 희토류 같은 분야는 분리하되 일반 교역은 유지한다는 구도입니다. 미국 기업들이 중국에 계속 투자한다는 발언과 AI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발언이 모순처럼 들리지만, 이 디리스킹 개념으로 보면 일관된 전략입니다.
희토류 공급망 문제도 여기서 빠질 수 없습니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최근 서명한 광물 자원 협력 문서에는 "실제 비용을 반영하는 시장 환경 조성"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가격 하한제(Price Floor)를 의미합니다. 가격 하한제란 특정 상품의 가격이 일정 수준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설정하는 제도로, 중국산 저가 희토류가 시장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면 한국처럼 희토류를 원료로 활용하는 중간 제조 단계에 있는 나라는 원재료 비용이 구조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 분야 관련 기업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눠봤을 때, 미국의 이 움직임을 단순한 선언으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실질적인 진행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직접 들었습니다. 저는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결국 이 세 가지 흐름, 해상 초크포인트의 무기화, 트럼프 행정부의 현실 인식 방식, 미중 AI·광물 패권 경쟁은 서로 분리된 사건이 아닙니다.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경제가 누려온 안정적인 교역 환경이 구조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를 일시적인 소음으로 읽을지, 장기적인 리스크 관리의 출발점으로 삼을지는 결국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투자·금융 조언이 아닙니다.